대화의 바깥에서
< 삼켜진 나라 #1 개인전 비평: 림배지희 >
청주시립미술관 오창관
2018. 6.20 – 6. 30
채영 ( 공간시은 운영자 )
림배지희의 회화는 상처 가득한 대지 위에 만들어진 균열로 우리를 이끈다. 그 곳은 무채색의 황량한 풍경에 덩그러니 놓인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이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갇혀있는 듯 보인다. 형벌을 받을 죄인과 상처받은 피해자들의 구분이 없는, 그래서 특정 불가능한 우울함이 방치되어 있는 장소다.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그렇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뒤섞여 있는 것도 아닌 이 풍경에는 상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요소들이 자리한다. 웅크리거나 절단된 신체, 훼손된 조각상, 화분이나 유리잔들 그리고 갈라진 대지나 남근적인 형상들은 어떤 사건들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사적으로 특별히 연결되지도 않는다. 표면적으로 회화는 우울하면서도 섬뜩한 그리고 폭력적인 세계의 한 장면을 그저 화면에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회화 속 세계는 부정적인 감각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림배지희의 회화가 상처나 고통 혹은 폭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회화에 그러한 것들이 있을 뿐이다. 화면은 흘러내리며 무너질 듯하다가 이내 딱딱하고 메마른 거친 표면을 드러낸다. 표면에는 가학적이면서 긁고 찌를 것만 같은 날카로움이 배어있다. 이 ‘그로테스크grotesque’한 풍경을 통해 느껴지는 불편함, 그 불쾌의 순간을 대면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 《삼켜진 나라#1》는 이전의 개인전 《혼(魂)잣말》과 이어져 있다. 전시는 회화와 설치작업을 통해 “타인과의 대화 중 발설하지 못하고 삼켜진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혼(魂)이 되어” 만든 세계를 보여준다. 이 혼들이 사물들과 풍경으로 전환되어 화면을 이룬다. 회화는 삼켜진 말인 혼들이 모인 ‘나라’와 혼들의 ‘말’이 전환된 형상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전시는 혼들로 만들어진 “허구적이고 단편적인” 장면들을 담은 회화들과 혼들의 언어가 시각적으로 전환된 회화들로 구성된다.
림배지희의 회화에서 무채색의 ‘삼켜진 말들’은 어둡고 침침하지만 동시에 강력하게 그 내면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감정의 상처들, 완전히 치유될 수 없는, 폭력의 흔적이자 고통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공유되지 못했던 기억의 말들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사회 이곳저곳의 사건들로부터, 또한 타인들 간의 대화들로부터 작가에게 발견되었지만, 발설되지 못하고 외부와 단절된 채 내면에 남아 있는 감정과 경험의 잔여물들이다. 이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내부 깊숙한 곳에 그대로 머물거나 대화의 표면 어딘가를 그저 떠돈다. 알다시피 언어는 애초에 말들의 의미를 완벽히 전달할 수 없다. 라캉에 따르면 기표로서 언어는 영원히 기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과잉이 되는데, 작가는 이 의미의 언어화가 갖고 있는 필연적인 상실을 ‘미리’ 알고 있다. 따라서 대화의 과정에서 그 의미들의 왜곡이나 변형을 우려하게 만들고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현실세계의 시선을 의식하게 한다. 작가는 내면의 말들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할 것이라는 상실감 때문에 대화의 순간에 전달을 포기하게 되는 이 ‘이중의 상실감’을 회화로 드러내고자 시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형상으로 전환된 이 시각적 언어들을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상실감을 담은 ‘혼’이라는 존재로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회화는 여전히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또한 비시각적인 기의들을 전달하기 위해 회화의 기표들은 종종 언어보다도 더 과잉된다. 그런데 림배지희의 최근 회화들은 이러한 상징들이 서사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각자의 형상들을 회화적으로 조합한 어떤 장면에 가깝다. 이전의 작업들이 회화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내용들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였다면, 최근의 작업들은 전달되지 못함에 따른 상실감을 더 드러낸다. 즉 이전의 회화가 과거에 억압된 일을 상기시켜 언어로 표출함으로써 그것과 관련된 정서들을 극복하는 해제반응(abreaction)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제 회화는 그 반응의 시도에서조차 일어나는, 시각언어가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상실하여 대화에서 언어화되기를 포기하고 삼켜지는 과정에 더 주목한다. 여기에서 작가가 회화의 표면으로 건져 올리는 것들은 삼켜진 내용들만이 아니다. 그것의 삼켜짐으로부터 오는 상실감과 삼켜야만 하는 내용들의 뒤섞임, 그것이 림배지희 회화의 ‘혼’이 된다.
그래서 작가는 삼켜진 말들의 사건을 재현하거나 그로부터 파생된 감각이나 감정들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을 통해 허구적인 장면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 허구적인 세계는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처럼 왜곡되고 뒤틀린 형상들을 취하면서 현실의 기호체계를 벗어난다. 이 때문에 연결되지 않는 기호들이 나열된 림배지희의 회화는 초현실주의 회화의 “서로 다른 리얼리티들의 병치”와 분명 유사성을 띈다. 초현실주의는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바꾸어 함께 놓음으로써 인습과 논리로부터 벗어나는 인식을 시도했다. 이때의 ‘오브제나 낯선 것끼리의 우연한 만남’은 림배지희의 회화가 취하고 있는 방법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 하지만 초현실주의가 이를 통해 리얼리티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림배지희의 회화는 리얼리티가 전달하지 못함에 따른 상실감에 주목한다. 즉 작가의 화면이 꾸준히 꿈이나 무의식처럼 보이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고 그곳에서 본질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만큼은 말들이 더 이상 삼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삼켜진 나라’는 의미들의 완벽한 해석은 불가능할지라도 전달의 시도가 가능한 세계이며, 의미들을 억누르고 말들을 삼키게 만드는 현실의 질서를 거부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소가 된다.
[* 루이 아라공은 “사물의 본질은 결코 그것의 리얼리티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며 “세상에는 우연, 환영, 환상, 꿈과 같이 정신에 의해서 포착될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다가오는 리얼리티 이상의 관계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들이 결합되어 이룬 하나의 속(genujs)이 초현실성이다.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오진경 옮김, (한길아트, 2001), 222쪽.]
따라서 회화 속 불분명한 어떤 사건들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은 이 세계를 불러내어 그것을 삼켜버린 현실의 세계 혹은 그 곳의 질서에 대한 부정과 공격을 시도한다. * 여기에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중 하나가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 모래 빼앗기 >(2018)다. 전시장 바닥에 펼쳐진 철로 된 프레임은 각각의 드로잉을 볼 수 있는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하나의 덩어리를 놓고 결국 쓰러지게 될 막대 주변을 서로 가져가는 이 놀이의 행위는 현실세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래가 지나가고 남은 흔적들, 중심에 꽂혀 있던 막대와 모래가 보여주는 구조적 형태로부터 작가는 어떤 감각들을 추출하여 시각언어로 표현한다. 이 설치작업은 마치 수집하듯 타인의 대화 속에서 발견된 ‘혼’들을 모아 놓은 < 이것을 새라고 하자 >(2018)와 함께 ‘혼’들이 외부세계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현실적인 듯 보이는 회화 속 장면들은 현실 너머의 상상 속 풍경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發話)가 불가능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로테스크는 생경해진 세계”다. 또한 별안간 다가온 낯설고 섬뜩함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이 그로테스크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이 생경함의 대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신뢰가 허상으로 판명되었을 때, 변해버린 세계로부터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여기에는 일상적인 삶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는다. 볼트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지혜 옮김, (아모르문디, 2011), 303-304쪽.]
< 모래 빼앗기 >뿐 아니라 다른 회화들에서도 화면 속 형상들을 ‘혼’ 이전의 상징들로 분리하여 보게 되면 이들이 개인의 기억이나 상처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사건 사고들로부터 받은 감정 등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형상들이 모여 하나의 화면이 될 때, 즉 작가에 의해 ‘혼’으로 다루어질 때, 원래의 내용은 사라지고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다른 맥락으로 보이기를 시도한다. 회화가 말하지 못한 의미들의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각자의 기호들을 모아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서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화는 무채색으로 상처, 공포, 불쾌, 혐오로부터의 감정들과 함께 그로테스크한 풍경과 신체, 도상의 녹아내림, 폭력적인 형태, 균열, 파괴의 형상들을 재현한다. 그런데 회화의 장면들은 비정상적이고 공격적이며 저항성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우울하고 애처롭다. 회화는 기괴하고 섬뜩한 형상들 틈에서 사회문화적인 상징체계들을 거칠게 뒤섞는다.
이 과정은 그래서 초현실주의보다는 아브젝트 아트abject art를 더욱 떠올리게 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따르면 아브젝트abject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들이다. 아브젝시옹abjection은 나를 위협하는 존재인 이 아브젝트에 대하여 혐오와 욕망의 양가적인 태도에 빠질 때 일어난다. *이 아브젝시옹은 아브젝트 미술에서 희열을 가져다주는데, ‘불쾌가 쾌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불쾌로 남아 풍부한 미적 감정이 되고 여기서 우리는 반미학의 쾌를 느끼게’ 된다. **림배지희 회화에서 변형된 신체들, 대상을 가두고 덮어버린 형상들은 이 내면의 소리들을 언어화하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대화의 자리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현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위험들로부터 미술을 통한 유희를 함께 보여준다. 이러한 반미학의 쾌는 언어와 사회 구조의 안에서는 왜곡되거나 변형될 수밖에 없었던 말들을 작가의 회화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그곳으로부터 분리하여 어떻게든 바깥의 장소로 끌어내기를 시도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 옮김, (동문사,2001), 25쪽. ** 김주현, “여성적 숭고와 아브젝시옹”, 몸문화연구소 편집, 『그로테스크의 몸』, (건국대학교 출판부, 2010), 53-54쪽.]
림배지희의 회화는 애초에 언어로 전달될 수 없고 그래서 당연히 대화로 옮겨지지 못하는 것들이 만든 세계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기존의 체계,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형상들을 취할 수밖에 없다. ‘혼’들이 모여 만든 세계인 그의 회화에서 그 혼들의 출처와 시각적인 전환에는 현실 세계로부터의 감각과 감정들이 여전히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글에서 이중의 상실감이라 표현한 감정들은 현실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로인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개인의 내면으로 남았을 때 시작된다. 이 잔여물들을 작가는 회화의 언어로 전환해보고자 실험하며 지속적으로 회화를 통한 대화를 시도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다시 전달의 실패와 포기 그리고 상실감으로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제 작가는 그 시도의 바깥에서, 의미들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현실을 ‘혼’이라는 뒤섞여 있는 작가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삼켜진 나라가 있다.
무명의 말 혹은 무채색의 그림
《내일의 미술가들 2018》 참여작가 비평:
청주시립미술관 2018.07.19-09.30
안소연 미술비평가
림배지희의 그림은 온통 검다. 흑연으로 화면을 꼼꼼하게 채워 놓은 그의 그림은, 검은 형상들로 가득하다. 검은색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은 마치 어둠 속에 매몰된 존재들처럼 눈에 쉽게 각인되지 못한다. 그저 무엇 무엇으로 상상되는 형상들이 “검음” 아래 봉인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림이 온통 검은 물질로 뒤덮여 있는 것은 아니다. 검고 하얀 명암이 화면 안에서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흰색의 공허함이 검은 윤곽을 자꾸 낯선 곳으로 몰아넣어 어떤 순간에 그만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풍경을 이루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그의 그림에서 “검음”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은, 흑과 백의 무채색이 불러일으키는 무거운 침묵에 사로잡힌 탓일 거다. 그의 그림에서 검음은 그 안에 침묵을 묻고 있다. 말하자면, 검은 형상들은 일종의 말할 수 없음을 표시하는 침묵의 나타남이다.
최근까지 그는 “삼켜진 나라”라는 주제를 정해 놓고 무채색의 그림에 여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쓴 작업 노트에 따르면, “삼켜진 나라는 타인과의 대화 중 발설하지 못하고 삼켜진 말들이 혼(魂)이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혼의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생겨나는 에피소드를 풍경이나 사물에 대입해 단편적, 허구적으로 묘사한 작업이다.” 그는 일상에서 누군가와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서 미처 말하지 못한 채 입 안으로 삼킨 말들에 주목하여, 그 말들의 일시적 거처를 그림 속에 구축해 놓은 셈이다. 때문에 이번 전시는 그의 말마따나 삼켜진 나라를 세우는 일에 가깝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난 말들이 한 곳으로 날아들어, 어떤 거대한 형상을 이루며 무채색 침묵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림배지희는 일련의 작업 과정에서 겪게 되는 내밀한 정서와 경험들을 전시로 차근차근 풀어낸다. 그는 “삼켜진 말들”의 정체와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나라”를 구축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꽤 구조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전시는, 그것을 구조화해 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된다.
< 이것을 새라고 하자 >(2018)는 작업의 출발점을 알린다. 전시 기간 동안 아홉 개의 나무판 위에 삼켜진 말이 차곡차곡 쌓인다. 한 가운데 대못을 박아 놓은 작은 나무판 위로 날마다 검은 형상들이 올라온다. 이내 기억 속에 묻혀 버리게 될 삼켜진 말들이 즉흥적으로 임의의 형상들로 옮겨져 예상치 못한 실체를 갖게 된다. 림배지희는 전시 기간 동안 길거리를 다니면서, 싸움이나 다툼이 일어나는 사건을 찾아 그것을 바라볼 때 생겨난 자신의 감정을 사물에 빗대어 기록하기로 했다. < 이것을 새라고 하자 >는 그렇게 시작한다. 일상의 감정을 수집하여 기억했다가 환상처럼 떠오르는 무채색 형상으로 남겨놓는 일이다. 그것은 지극히 즉흥적인데다 내밀하고 주관적인 기록이지만, 작가는 그렇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을 포착해 수수께끼 같은 형상을 부여해 본다. 그는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형상들에 일제히 “새”라고 이름 붙였다. 순식간에 날아든 감정, 또 어딘가로 추방될 기억에 대해 그는 허공을 부유하는 새로 인식했다. 새는, 다시 돌이 되고 나무가 되고 망치도 되었다가 꽃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전시장 바닥에는 각각의 모서리를 하나의 중심축에 모아 붙여 놓은 몇 개의 그림 틀이 반구 형태의 구조로 설치돼 있다. 마치 화첩처럼 생긴 이 구조물 안에는, 그가 “새”라고 이름붙인 검은 형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언가로 채워있다. 세 점으로 구성된 < 모래 빼앗기 >(2018)는, < 이것을 새라고 하자 >와 같이 무언가로 이름 붙여지기 전, 또 무언가로도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불확실한 가능성”으로서의 검은 형상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맥락을 구조적으로 드러내는 < 모래 빼앗기 >는, 예컨대 떼었다 다시 붙이면서 자유롭게 형태를 조율할 수 있는 유연함을 함의한다. 삼켜진 말들이 자리하고 있는 방식은, 마치 기억처럼 일련의 지층을 이루며 구축된다. 반면 단단한 지층으로부터 파열을 일으키며 솟아오르는 기억의 회귀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배열을 단숨에 바꿀 만큼 능동적이고 강렬하다. 책장 모서리에 숨어 있는 불확실한 형상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처럼.
한동안 림배지희는 꿈의 장면들을 그림으로 옮기는데 몰두했다. 과거의 억압된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예언이 한 데 뒤섞인 꿈의 서사는, 합리적인 현실의 논리와 거리를 두고 고립을 자처했던 작가가 정지된 일상을 새롭게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꿈의 세계로 전도된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못한 사건들에 형상을 부여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실에서 버려지는 비현실적인 존재들을 불러와 그림에 옮겼다. 앞에서 내내 언급했던 “삼켜진 말들”이 그런 예다. 림배지희는 일상에서 자신이 겪은 상황들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 혹은 드러내지 못한 무명의 존재들에 주목해, 그것을 형상으로 수집해 두었다가 서사의 새로운 단면을 채울 실체를 찾아 현실의 사건을 다시 재구성한다. 예컨대, 그는 < 분열 >(2018)이나 < 점 점 >(2018)에서 그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탁자, 구멍, 연기, 헝겊, 유리잔 등 각각의 사물들과 그 사물들이 처한 수수께끼 같은 상황은, 모두 그가 경험한 사건의 이면과 충돌하고 겹쳐진다. 이처럼 삼켜진 말들과 은폐된 기억들이 화면 위로 쏟아져 나오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 기술적이면서 동시에 분열적이기도 한 이미지 변형을 즉각 떠올리게 한다.
< 강강술래 >(2017)을 보면, 마술적인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를테면, 갈라진 땅 위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인체의 파편들이 맥락 없이 흩어져 있는데, 하나는 생명 없는 석고상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인체의 부분을 절단해 그려 넣은 것 같기도 하다. 또 원형 구조물이 갈라진 바닥 틈새 사이에서 그것을 메우고 것인지 아니면 더 균열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지 애매한 상태로 그림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갈라진 땅은 경계를 알 수 없는 파도와 연기로 가득 둘러싸여 있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지 깃발이 날리고 있으며, 작은 돌멩이들은 힘의 근원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줄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 역시 검은 형상들로 가득한 흑백의 무채색이다. 림배지희는 일상에서 드러내지 못한 채 좌절된 말들 혹은 감정들을 검은 그림 위에 변형된 모습으로 펼쳐놓는다. 마치 침묵처럼, 불확실한 검은 형상들이 환기시키는 서사는 실체 없는 것들의 나타남이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삼킨 말들과 숨겨진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어둠임을 자처한다.
림배지희의 “삼켜진 나라”에 떠도는 무명의 말 혹은 무채색의 그림은 어둠처럼 불확실하다. 그는 그 불확실함 속에서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방어를 꾀하듯, 좌절할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서사의 구축에 매달려 있다. 오지 않은 미래의 현실이었을지 모르는 삼켜진 말들을 어루만지면서.
암묵적 기억의 작동 방식
(2016)
우민아트센터 조지현 학예실장
저항을 위한 은둔, 외부 세계로부터 온전한 고립을 위한 침잠, 무수한 색깔의 말들을 위한 침묵은 림배지희의 화면 안에서 모든 세계를 일시적으로 멈춰 서게 만들며 반복적 소음과 절대 적막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파열음으로 이내 공감각적 세계를 소환한다.
림배지희에게 눈앞에 닥친 현실은 너무나 버겁고 꿈보다 비현실적이었기에 이러한 악몽 같은 상황에 억눌려온 자존적 무게감은 외부로부터의 관심을 소진시켜 내면으로 향하게 만든다.
화면에 드리운 응축된 감정들은 서서히 증폭되어 폭발하기 직전의 위급 상황을 연상시키며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게 한다. 그 안에 속박된 인물 형상들은 금방이라도 붕괴돼 버릴 듯한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큼 고요하게 상황적 혼돈을 삼켜내고 있다. 기억과 무의식 사이를 부유하는 잔상들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적 사회 구조 속에 방치되었던 작가 자신의 투영일 뿐 아니라 나약한 이들의 삶을 은유한다.
오랫동안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는 기억의 속성이 그러하듯 다 써버린 감정의 허물은 조각난 흔적으로 어딘가에 남겨진다.
작가는 명확함이 없는 주절거림으로 끝이 맺어질 수 없는 지둔한 삶의 연속성처럼 드로잉이라는 매체를 통해 중층적 레이어로 무리하게 완결시켜 놓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했을 고립무원의 상황은 오히려 작가에겐 심리적 도피처이자 안식처로 작동했을 것이다. 온전히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내부 세계의 분열은 소리 없는 외침, 해소되지 못한 감정적 응어리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고 불분명한 그림자와 앞뒤의 경계가 뒤바뀐 비이성적 세계의 논리를 투영시킨다. 모호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혼돈된 자아는 화면 안에서 반복적인 붓질과 지우기를 통해 불안한 형상으로 변이된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 개인의 자아정체성의 손상과 상처로 점철된 문제로만 국한시켜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비물질적 폭력에 방치된 불특정 다수의 대항적 행동양식의 일부이며,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작동하는 약자의 시선이기도 하다.
림배지희의 작업은 뜨거운 냉소, 차분한 분노, 유약한 용기와 같은 양가감정을 통해 놀랄 만큼 초연한 태도로 감정의 민낯을 드러낸다.
끝내는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말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은 삶의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작가의 작업 방식으로 치환되어 화면 안에서 서서히 희석됐으리라.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어떠한 외침보다 더 큰 공명으로 전해지는 불가항력적 시련 앞에 무기력해야만 했던 상처받은 영혼을 발견했고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미래의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고난 앞에 놓인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해 또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보게 한다.